한산성

2015년 10월 11일 



<삼성 갤럭시S-4 >


 

에구 에구

소리 절로 나온다.

나 이러다 치매 빨리 오는거 아니려나.

후~

이 나이에 이래도 되는거 맞나몰라

깜박 깜박이 하나둘 늘어가니

내 머리 스스로 때려야 하는날 늘어간다.

오늘도 그러하다.

..

카메라 밧데리 충전하며 메모리카드 빠져있는거 확인하고 껴야지 했는데

산성 도착 카메라 깨내면서야 아차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이런 젠장 머리 두어대 쥐어 박았다.

메모리카드 안끼웠다.

알고도 바로행하지 아니한 벌이로구나.

 

이제 내머리 내가 믿을수 없는 내가 되어진 것은 아닌지

걱정스럽기까지 하다.

그저 한두번 이니 괜찮으려나 생각도 들지만

이즈음 확실이 깜박이 늘어났다.

 

가을 담으려 산성 올라왔는데.

멍텅구리 카메라 들고왔으니 그 무게가 짜증 유발 거츠장스럽기 배가 되어진다.

스마폰으로 담아보는데 그마저 밧데리 눈끔이 달랑거린다.

 

정신차려 이친구야.

....


 

가을비

 

 

기다림이 길어져 목이 아프다.

주룩주룩 내려주면 좋은데

바람만 드세다.

 

어제는 반팔 오늘은 긴팔

가을 오는데 겨울이 함께하려나 보다.

반칙이다.

 

가을비

내려주었으면 좋겠다.

갈증해소 되도록




행궁

남한산성 안에 있는 조선시대 행궁터로, 2007년 6월8일에 사적 제480호로 지정되었다. 

남한산성행궁은 1624년(인조 2년)에 착공해 1626년에 완공된 조선시대의 별궁으로, 유사시에 임금이 임시로 머무르던 궁궐 중 하나였다. 

병자호란 때는 임시 궁궐로 사용되기도 했다. 남한산성행궁은 북한산성행궁, 화성행궁과 함께 우리나라의 대표적인 행궁으로 꼽히는데, 

조선 역대 왕들이 남한산성의 군사적 가치를 특히 높게 평가했다고 한다. 

현재 행궁지는 구릉이 시작되는 곳의 약간 경사진 터에 위치하고 있는데, 일제시대에는 이곳에 면사무소가 있었다고 한다. 

《남한지(南漢誌)》에 따르면 숙종, 영조, 정조가 영릉(寧陵)을 참배할 때 이곳에 머물렀고, 

후대에는 지방관인 유수(留守)의 집무실로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원래는 상궐(上闕) 73칸, 하궐(下闕) 154칸 등 총 3단 227칸으로 이루어진 행궁이었으나 모두 불에 타서 없어졌다. 

현재 남한산성행궁지에는 상궐, 남행각, 북행각, 재덕당, 좌승당 등이 복원되었다.


 

  

 

 

 

 

침괘정

한산성 동쪽 작은 언덕 위에 자리한 정각으로 인조 2년(1624) 남한산성을 축조하던 관리 이서가 숲 속에서 오랜 고각 하나를 발견했다. 

건조 연대는 불확실하지만 발견당시 주춧돌이 견고했고, 방에는 수척 높이에 달하는 온돌이 있었다. 

시험 삼아 아궁이에 불을 때어보니 온돌의 기능도 살아있었다. 당시 주민들은 이것이 백제 온조왕의 왕궁지라고 추측했다. 

하지만 이런 추측을 증명할 자료는 없다. 현재의 건물은 영조 27년(1751) 중수한 것이라, 

이서가 발견할 당시의 건물 형태는 짐작할 길이 없다. 침괘정이라는 명칭 역시 정조 때 붙여진 것이다.


 

 

 


숭열전

1638년(인조16년)에 지은 사당으로, 백제 시조인 온조왕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 

온조를 모신 사당은 원래 충청도 직산에 있었으나 선조 30년 정유재란으로 소실되었다. 

그러자 선조 36년 백제의 첫 도읍지였던 남한산성으로 사당을 옮기고, 이것을 인조 16년에 고쳐지었다.  

훗날 남한산성을 쌓을 당시 총책임자였고, 병자호란(1636) 때 싸우다 죽은 이서의 위패를 함께 모셨다. 

원래 건물 이름은 ‘온조왕사’였으나 정조 19년(1795)에 왕이 ‘숭열’이라는 현판을 내려 숭열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이며,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정조대왕의 꿈에 온조왕이 나타나 정조의 인품과 성업을 칭찬하면서, 

혼자 있기가 쓸쓸하니 죽은 사람 중에서 명망 있는 신하를 같이 있게 해달라고 했다.  

이에 정조는 남한산성을 쌓은 공로자이며 인조가 총애했던 이서를 같이 모셨다고 한다.


이서장군 1580∼1637(선조 13∼인조 15) | 시호 충정
조선 중기 무신. 자는 인숙(寅叔), 호는 월봉(月峰). 본관은 전주

1603년(선조 36) 무과에 급제한 뒤 진도군수 등을 지냈고 23년(인조 1) 장단부사로 경기방어사를 겸임하는 한편 
김류·이귀(李貴) 등과 군사를 일으켜 광해군을 내쫓고 인조를 세워 정사공신 1등으로 완풍부원군에 봉하여지고 호조판서에 보직되었다. 
26년 수어사가 되어 남한산성을 수축하였고 28년 형조판서를 거쳐 32년 특명으로 공조판서가 되어 청나라 침입에 대비하였다. 3
6년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서 적군을 막다가 진중에서 병사하였다. 산수에 능하고 독서를 즐겨하여 장서가 많았으며 효성이 지극하였다. 
영의정에 추증되었으며, 남한산성의 온조왕묘와 인조의 묘정에 배향되었다. 저서로는 《화포식언해》와 《마경언해》가 있다.

 

 

 

 










수어장대

1624년(인조 2년) 남한산성을 쌓을 때 만든 4개의 장대 중 유일하게 남은 곳이다. 

장대란 지휘관이 올라서서 군대를 지휘하도록 높은 곳에 쌓는 대(臺)를 말한다. 

수어장대는 남한산성 안에서 최고봉인 일장산 꼭대기에 자리 잡고 있어 성 내부와 인근 주변까지 바라볼 수 있다. 

병자호란 때는 인조가 직접 이곳에서 군사를 지휘하여 청나라 태종의 군대와 45일간 대항해 싸웠다. 

처음에는 1층 누각으로 짓고 서장대라 불렀으나, 영조 27년(1751) 왕의 명령으로 서장대 위에 2층 누각을 지었다. 

건물의 바깥쪽 앞면에는 ‘수어장대’라는 현판이, 안쪽에는 ‘무망루’라는 현판이 걸려있다. 

무망루란 병자호란 때 인조가 겪은 시련과 아들 효종이 청나라에 대한 복수로 북쪽 땅을 정벌하려다 실패하고 

죽은 비통함을 잊지 말자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영조와 정조는 효종의 무덤에 제례를 드리고 상경하는 길에 이곳에 들러 선왕들의 유업을 되새기곤 했다. 

지금 건물은 1896년에 유수 박기수가 다시 지은 것이다.







깊어지는 가을

어울림이 아름다운 산성 

 담아 가세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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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2013년 7월 20일

 

2주간 계속되어진 지리한 장마비

맑은 바람 반짝해 보고픈 날이였는데.

참으로 오랜만에 파란하늘 흰구름

 

남한산성 올라보니

^^

 

능소화

 

접시꽃

 

 

 

 

행궁

침쾌정

숭렬전

줌마들의 휴식처

서울

 

수어장대

 

 

다정한 연인

 

 

 

 

 

 

 

광주문인 그림 시화전

 

 

청계산 관악산

 

 

북한산 백운 인수봉

 

 

하남 덕소방향

 

 

 

연주봉 옹성

 

 

 

 

 

 

 

 

북문

 

 

 

파란하늘 흰구름

사이사이 불어드는 바람

좋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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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2012년 10월 3일

 

산성역(11시50분)~남문~침괘정~숭열전~서문~남문~산성역(17시20분)

 

 

 

산성 주차장에 세우고 산성 돌아들려 계획했는데

산성으로 오르는 도로 차들로 정체되어

산성역 근처에 차세우고

오르기 시작

 

찰베이 무리아니되도록 적당히 돌아들고 하산하였네요.

 

 

 

 

 

 

<약사사>

 

 

 

< 남문>

 

<복원된 남한산성 행궁>

 

 <숭열전>

조선 인조 16년(1638)에 지은 사당으로 백제의 시조인 온조왕을 모시고 있다.

 

뒷날 남한산성을 쌓을 당시 총책임자였고 병자호란(1636) 때 싸우다 죽은 이서의 위패를 함께 모셨다.

원래 건물 이름은 ‘온조왕사’였으나 정조 19년(1795)에 왕이 ‘숭렬’이라는 현판을 내려 숭렬전으로 이름을 바꾸었다.

앞면 3칸·옆면 2칸 규모로 지붕은 옆면에서 볼 때 사람 인(人)자 모양인 맞배지붕으로 꾸몄다.

 

전하는 말에 따르면 정조대왕의 꿈에 온조왕이 나타나

 정조의 인품과 성업을 칭찬하면서 혼자 있기가 쓸쓸하니 죽은 사람 중에서 명망있는 신하를 같이 있게 해달라고 하였다.

이에 정조는 남한산성을 쌓은 공로자인 이서를 같이 모시게 했다.

 

 

 <점심자리에서 내려다보이는 동문방향>

 

 

 

 <서울 서울 서울>

 

<서문>

<성 밖으로>

 

 

 

 <곧~ 들국화 만발할듯>

 

<꿩의비름>

 

<여러 진사님들이 성벽에 붙어 대포들이대며 정성으로 담아내고 있었는데

산성은 중포가 말썽중이라 소포로>

 

 

<암문>

<다시 성 안으로>

 

 

 

 

 

 

 

 

 

 

 <ㅎ>

 

 

<아래로 아래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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